“하녀를 모집합니다. 다른 조건은 없으나 주인과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됩니다.” 이 특이한 구인광고는 과학자 캐번디시가 내놓은 하녀 모집 광고이다. 여성기피증이 심했던 캐번디시는 하녀모집 시 하녀를 고용할 자기와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내놓았다. 만일 우연이라도 하녀와 마주치는 일이 생겼을 경우엔 그 하녀를 당장 해고시켰다. 오다가다 하녀들과 마주치고 또 명령을 내리는 것이 꽤나 불편했던 그는, 고민 끝에 식사주문이나 세탁과 관련된 모든 지시사항을 쪽지로 책상 위에 남겨 뒀고, 하녀들을 피해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출입구를 만들기도 했다. 과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또 당시 사람들에게는 칭송을 받던 과학자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상식에서는 벗어난 사람도 많다. 수소를 발견한 인물로 유명한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 역시 특이한 삶을 살다간 과학자 중 한 명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겸 화학자인 캐번디시는 영국 귀족인 찰스 캐번디시의 장남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나 1749년에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했으나 졸업 시험을 치르기가 싫어 4년 동안 재학한 대학을 떠나 학위를 받지 못했고, 런던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공부했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지만 청년이 된 이후에는 너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늘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이 때문에 심한 여성혐오증을 보였고, 종국에는 여성 대신 과학과 결혼하는 삶을 선택했다. 먼 삼촌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모든 학식 있는 사람 중 가장 부자이며, 모든 부자들 중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한 것. 자신의 집에 도서관을 꾸미고, 과학연구를 위한 정교한 실험기구들을 사들이고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80년을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말을 적게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처럼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캐번디시가 처음 발표한 논문은 1766년의 <인공의 공기들>로 ‘가연성 공기(수소)와 고정 공기(이산화탄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현재 기체 혹은 ‘가스’라 불리는 것을, 그 때는 ‘공기’라고 불렀다) 18세기 당시는 기체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되던 시기로, 공기가 단일 물질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캐번디시는 우연한 기회에 사용한 수돗물이 흐린 것을 보고 그 물의 성분을 조사하면서 아연이나 철에 산을 넣으면 수소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산소와 합치면 물이 되는 것이 수소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이 실험으로 그 때까지 단 한 종류의 원자로만 만들어진 ‘원소’라고 알고 있던 물이 원소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캐번디시는 이 수소가스를 ‘불타는 공기’라고 명명했는데 이 ‘불타는 공기(수소)’가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수소와 같이 대기의 한 성분을 이루는 순수한 물질이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다. 참고로 우리가 사용하는 ‘수소’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1743-1794)이다. 어찌됐든 캐번디시는 실험을 거듭해 ‘불타는 공기(수소)’는 물의 8760분의 1, 보통 공기의 11분의 1의 무게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탄산칼슘이라는 알칼리성 물질을 염산이나 황산에 녹이거나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얻어진다는 것과, 이산화탄소는 물에 잘 녹는다는 사실도 동시에 밝혔다. 참고로 오늘날의 정밀한 측정에 따르면 수소는 보통 공기의 14.1분의 1의 무게를 갖는다. 이 외에도 캐번디시는 많은 실험과 연구를 하여 여러 논문을 남겼으나 보관만 할 뿐 발표를 하지 않아 3/4이 미발표 업적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가 죽고 나서 1세기가 지난 후에 J.C.맥스웰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많은 선구적 실험들을 발견하여 그의 주옥같은 연구결과들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실 캐번디시는 쿨롱보다 훨씬 먼저 ‘쿨롱의 법칙’과 ‘옴의 법칙’도 발견했지만, 그의 엽기적인 성격 덕에 살아 있을 때 연구 결과를 출판하지 못해 새로운 법칙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수소 발견이라는 위대한 과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갈채를 받지 못한 채 베일 속에 살다간 캐번디시. 그러나 오늘날 그와 그의 가문은 영국의 전설적인 과학자로 남아 있다. 캐번디시가 남긴 유산으로 제7대 윌리엄 캐번디시가 캐번디시를 기념하는 ‘캐번디시물리학연구소’를 세워, 영국에서 체계적인 과학교육과 과학연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정책적 차원의 지지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 엽기적(?)이긴 하지만 과학에 몰두했던 그의 업적과 과학이 학문의 한 분야로 정착되지 못했던 시절, 국가도 외면해 버린 과학사랑을 후원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대를 이어 봉사해 온,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에게 과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본보기의 과학사랑 가문이기에 케번디시는 영원히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글 :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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